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06년(광무 10) 12월 11일 13세로 동궁계비(東宮繼妃)로 책봉되었고,
이때 아버지 윤택영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 거액의 뇌물이 오갔다는 풍설이 돌았다.
이듬해인 1907년 7월 19일에 남편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될 때 어전회의(오후 2시)의 진행을 병풍 뒤에 숨어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 할 것을 강요하자 옥새(국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백부(큰아버지) 윤덕영(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잘못 전하는 내용이다.)
지금부터 유튜브 박종인의 땅의 역사에 언급된 내용을 적어 봅니다.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정교(鄭喬)라는 독립운동가가
고종이 등극한 1864년부터 나라가 없어진 1910년까지 역사를 시간순으로 정리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1925년 정교(鄭喬)가 죽을 때까지 집필한 책이다.
이 책에는 그날의 장면이 묘사돼 있다.
“ 해질 무렵 통감부의 모든 관리와 이완용 등 각 대신 시종원 경 윤덕영, 중추원 의장 김윤식이 창덕궁에 모였다.
오후 6시쯤 이완용과 윤덕영이 두 조칙을 내놓고 옥새를 찍으라고 폐하를 몰아세웠다.
폐하께서는 어찌할지를 몰라 하셨다.
김윤식만이 유독 나서서 ‘생각건대 우리 한국은 폐하 한 분의 나라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 사람에게 양여하는 것은 가볍게 논의해서는 안됩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완용과 윤덕영은 일본인의 지시를 받고 곧바로 김윤식과 여러 사람들을 쫒아냈다.
마침내 옥새를 가져다 문서에 찍었다.
그때 일본인들이 옥새를 통감부로 가져갔다. ”
실록과 일본 기록에 따르면 어전회의가 열린 시각은 오후 2시이다.
정교(鄭喬)라는 인물이 회의석상에 없었기 때문에 시간은 오류가 있을 수 있겠으나,
이 기록에는 이완용과 윤덕영이 옥새를 찍으라고 폐하를 몰아세웠다 라고 적혀있다.
순정효황후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만일 황비가 병풍 뒤에 있다가 옥새를 빼앗았다면
독립운동가 정교(鄭喬)가 그 어마마한 사실을 빼놓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임시정부를 운영했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기관지 한민(韓民)이라는 잡지에서도 내용을 볼수 있다.
1936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기념한 특별 기사이다.
“ 완용은 합방조셔를 제 손으로 치엿으나 옥새를 도적할 길이 없으매
저같이 개창자를 가진 황후의 숙부 윤덕영을 식히어 이 일을 실행케 하엿다.
이 부탁을 받은 덕영은 황제가 곤히 잠든 틈에 목젹을 달하려고 하엿다.
놀라 깨인 황후는 눈물을 흘리며 덕영을 꾸지 젓으나
그놈은 긔탄없이 황후를 넘어트리고 필경 옥새를 빼서서 완용을 통하야 사내(데라우치)에게 젼하엿다.
덕영은 이 연유로 자쟉에 참여코 특사금(은사금) 40만원을 받엇다. [한민(韓民) 제6호 (1936.8.29.)] ”
임정 요인이자 사학자인 박은식(朴殷植)이 1915년에 쓴 한국통사(韓國痛史)에는,
“ 이완용 등이 나라를 일본에게 이양한다는 조칙을 사사로이 만들어
황후의 숙부 윤덕영에게 주어 녹새를 찍게 하였으니,
황제는 흐느끼면서 승낙하지 않았으며, 황후 또한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윤덕영은 황후에게 통곡을 그치라고 하면서, ‘아러면 일족이 모두 살해되는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윤덕영은 순종이 취침에 들어간 틈을 타서 몰래 옥새를 찍어가지고 이완용에게 주었으며
이완용은 그것을 데라우치에게 주었다.
그런 까닭으로 일본 정부는 윤덕영을 자작에 봉하고 특별은사금 40만원을 주었다. ”
1966년 6월, 동아일보가 발행하는 시사잡지 신동아 6월호에
김상궁이 쓴 ‘순정효황후를 모시고 ? 상궁 김명길 회고록’ 의 내용이다.
“ 나는 희정당 서온애, 마마의 처소에 앉으신 마마 곁에 꿇어앉아 있었다.
웅성대며 몰려오는 사람들 소리에 나는 반침 밖으로 살그머니 내다보았다.
건너편에 보이는 상감마마께서 계신 흥복헌을 수십이 넘는 일본 순사가 삥 둘러싸고 있었다.
다전(多田)이라는 일인 찬시가 앞서고, 그 뒤로 독살스럽게 생긴 이완용 총리, 눈이 부리부리한 윤덕영 자작,
뚱뚱하고 넙적한 얼굴의 철종대왕 사위님이신 박영효, 둥그런 얼굴이 꺼멓고 무지스럽게 생긴 송병준,
뒤에 총독부 이왕직 장관을 지낸 민병석, 농상대신 조중응 등이 흥복헌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마도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말없이 내다보고 계셨다. ”
이상은 병합조약을 다루는 어전회의 당일의 풍경이다.
이때 김명길 상궁과 순정효왕후 윤씨는 휸복헌 건너편 온돌방에 같이 있었다.
“ 반 시간쯤 뒤에는 그들이 다시 아까보다 더욱 웅성대며 빠른 걸음걸이로 돌아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때 다전(多田)의 손에 옥새가 쥐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마마께서 잠시 머뭇거리시는 듯하시더니 일어서셨다. 나도 일어섰다.
확실히 기억되지 않으나 이때 마마는 반침을 나서서 육간 대청마루를 건너 동온애 상감마마 처소를 지나
흥복헌에 들어가신 것 같다.
나는 뒤로 뛰어가서 십여 명의 궁녀와 얼싸안고 소리내어 울었다.
엉엉 소리내어 흐느끼는 소리에 마마께서 반침 너머로 ‘소요스럽구나. 국운이 다 한 걸... 운다고 일이 되느냐’ 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꾸짖으셨다. ”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가 남긴 목격담이다.
목격자이자 증언자인 김명길 상궁은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본인과 순정효황후 윤씨는 흥복헌 건너편 온돌방에 있었다고 증언을 한다.
옥새가 없어졌다는 이야기,
옥새를 윤덕영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
순정효황후 윤씨가 그 옥새를 치맛폭에 감췄다는 이야기,
무엇보다 순정효황후 윤씨가 흥복헌 병풍 뒤에 숨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김명길 상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병합 후 궁중 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 순종황제는 ‘왕’으로 강칭되시고, 황후 마마는 왕비 마마가 되셨으나, 궁내애서는 예전대로의 호칭이 허용되었다.
이제 대한제국의 황실은 일본 궁내성의 예산으로 살림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궁내 생활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호사스러웠다.
그들은 온 조선을 착취하기 위해서 궁내에서는 입의 혀처럼 굴었다. 실로 눈감고 아웅격이었다.
수랏간에 양식 수랏간을 따로 마련하여 요리사를 두고, 일주일에 두번씩 양식을 해올리게 하고,
케익, 과자 등을 직접 구워올리는가 하면, 연회를 자주 열어 옥좌가 있던 인정전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키도 하고,
곡마단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
참고로 다음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에서
"순정효황후" 의 내용에서도 치맛폭 내용은 지워졌다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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