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이토히로부미의 말에 다들 속아서 안중근, 이준, 일진회가 일본을 응원했습니다.
이토히로부미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근대화시키고, 언젠가는 독립하게 해준다고 말해서 속은 것이죠.
유자후가 지은 '이준선생전' 으로 이준선생의 일대기는 잘 알려져 있는데, 이책은 오류가 많다고 합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이준은 이현석, 정순만과 함께 적십자회를 조직, 의연금을 모금해 일본군 부상자를 돕자는 취지의 동지권고문(同志勸告文)을 발표한다.
이들이 발표한 권고문에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킨 것은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해서이니 한국의 인민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대한제국 경무청은 외국과 결탁하고 민심을 선동한 죄로 이들을 체포해 태 80대를 선고한다.
책에 언급된 이준이 한일의정서 반대운동을 이끌었다는 이준선생전의 기록 역시 당시 이준이 적십자 의연금 사건으로 체포된 상태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받아들이기 힘들며,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했다는 내용도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반일로 돌아선 계기는 그의 행적에서 미루어 볼 때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해 결정적인 심경변화를 겪었을 것
그 무렵 이준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의 집결지인 상동교회에 모인 사람들과 교분을 맺은 것도 하나의 계기였을 것
1906년 이준은 친일에서 반일로 전향했음을 상징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평리원 검사로 다시 관직에 복귀한 이준은 사면문제로 상관인 법부대신과 정면으로 충돌해 투옥된다.
이 때 이준이 사면을 주장한 인물은 을사오적 중 하나인 이근택을 찌른 기산도였으며 그와 맞선 사람은 이하영, 이윤용 등 친일 인사들이었다. 그가 재판을 받을 때 일본 헌병은 법원을 둘러싸고 항의하는 군중을 내몰아야 했다.
흥선대원군 시절인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를 없앴는데.
하여튼 식민지근대화론을 믿는 쉐키들은 좌빨에 세뇌된 저능한 것들이라 살처분하는 게 바람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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