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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 탄핵의 역사적 배경
이승만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9월 상해에서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가 통합해 출범했다. 이때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넘어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 오지 않았다.
이에 임시정부의 소장파들은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였는데, 이에 대해 안창호가 반대하여 불신임안은 일단 없던 일이 됐다. 그러나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임시정부는 북경파(신채호 등)의 비판을 받게 됐다.
이는 1919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은 당장 독립될 가망이 없고 또 독립된다고 하더라도 자치능력이 없으니 미국이 주관하여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한국을 당분간 위임 통치하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고 알려진 것이다.
당시 신채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라고 비판한 것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이승만은 1920년 12월 결국 상해로 왔다. 이때 이동휘는 이승만의 위임통치 문제 때문에 임정이 비난을 받고 있다면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거부했다. 또 대통령이 상해에 없을 때 행정결재권을 국무총리에게 위임하자는 안에 대해서도 이승만은 거부했다. 결국, 이동휘는 1921년 1월 총리직을 사직하고 임정을 떠났다. 이승만도 그해 5월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임시의정원은 1923년 4월 이승만 탄핵안을 제출하였으나 국민대표대회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탄핵안은 논의되지 못했고, 1924년 9월 임시의정원은 임시대통령이 유고(有故) 상태에 있다고 결정하고, 국무총리 이동녕에게 대통령직을 대리하도록 명했다.
이에 이승만은 크게 반발하여, 하와이 민단장 등에게 임시정부로 보내는 인구세 등 독립자금을 보내지 말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임시의정원은 그해 12월 국무총리직을 물러난 박은식을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로 추대하고, 임정의 새로운 지도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에 이승만은 임시의정원의 결정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이승만은 “한성정부 약법 제6조에 「본 약법은 정식 국회를 소집 하야 헌법을 반포하기까지 이를 적용함」이라 한 법문(法文)과 위반되는 일을 하여 한성조직의 계통을 보유치 못하게 될 경우 절대 준행치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한성정부가 아닌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은 여전히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의 주장이 임시의정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23일 이승만을 탄핵, 면직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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